NOTES / 2025

2025 작가노트

June 08, 2025

나는 흙으로 사람을 만들기를 즐겨 하는 조각가다.

2010년경부터 조각과 다른 형태의 그림자에 집중하며, 조각 작품과 그림자가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형식에 빠져 있었다. 이러한 그림자 작품을 통해 인간 심리를 묘사하거나, 소외된 존재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내곤 했다. 그림자 작업은 자연스럽게 여백 작업으로 이어져, 조각 작품을 제외한 공간에 의미 있는 여백이 맺히게 하는 방식으로 확장되었다. 그림자와 여백처럼 비물질적인 요소를 작업의 재료로 삼은 이유는, 기존의 질서와 가치체계를 벗어나고자 한 노력이며, 일상에서 간과하고 지나가는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이 세상에 이미 정해진 규율이 터무니없는 것도 너무 많았고, 허투루 볼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시청각장애인, 쉼터 청소년들, 폭력에 노출되어 여성의 전화에 도움을 요청한 이들과 직간접적으로 관계 맺고 있었다. 그들과 나눈 대화나 함께한 경험들은 자연스럽게 작업의 소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코로나가 터졌다.

질병은 우리의 연대를 위축시켰고, 창작보다는 교육과 기획, 그 외의 잡다한 일로 생계를 이어가던 나는 막다른 절벽에 놓였다. 강의와 전시와 프로젝트와 작가로서 진행하던 모든 일이 멈추었고, 살기 위해 해야 할 건 건설현장의 노가다 외엔 없었다. 그러던 중, 모든 것이 비대면으로 전환되면서 컴퓨터를 배워야겠다고 결심했고, 오래전부터 배우고 싶었던 3D 프로그램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기존의 그림자와 여백 작업의 에스키스를 만들기 위한 용도였지만, 공부할수록 새로운 작업의 세계가 열리는 듯했다. 그리고 점점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면서 인간이 만들어낸 재앙에 대한 고민이 깊어졌다.

끊임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며 쓰레기를 양산하는 자본주의 시스템 속에서, 우리가 사는 이 별은 점점 병들어 가고, 폭염과 폭설과 폭우가 나를 위협하는 현실을 반복하며, 자연스럽게 나의 작업 방식에 대한 회의도 찾아왔다.

소조 작업은 엄청난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점토는 자연 그 자체이지만, 작품으로 완성하려면 석고나 폴리로 캐스팅을 거쳐야 하며, 이 과정에서 발생하는 폐기물은 작품의 부피를 압도한다. 그러나 3D로 작업하면 작품의 크기와 디테일을 자유롭게 조정할 수 있고, 출력할 때만 물질로 변환되므로 불필요한 폐기물을 최소화할 수 있다. 끝내 마음에 들지 않는 작품은 하드디스크 하나에 저장해 두면 그만이니, 물질로 존재하는 작품에 대한 부담이 없는 샘이다.

그러던 중, 2022년 당진 바닷가에서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썰물 때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드넓은 갯벌을 헤매다가 쇳조각 하나를 발견했다. 조개며 따개비가 덕지덕지 달라붙은 쇳조각이었는데, 커다란 쇠못 같았다. 그곳에 의외로 그런 쇳조각이 많아서 널브러진 쇳조각들을 열심히 주웠다.

당진은 원래 수십 킬로미터에 달하는 드넓은 갯벌이었는데, 갯벌을 메우고 땅으로 만들어 공장을 지었다. 그 공장에서 폐수가 흘러 바닷가의 물고기가 병들고 사라지니, 어부였던 주민들에게 땅을 주어 농부로 둔갑시켰다. 내가 주운 그 쇳조각은 어부들이 사용했던 어선을 파쇄한 부수물이었다. 그 조각들을 즉흥적으로 연결하여 다양한 형상을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문득, 내가 왜 그림자와 여백에 갇혀있었는지, 왜 사람의 형상에 집착하는지, 왜 3D와 소조 작업에 우열을 두고 있었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구체나 원이 가장 안정적이며 완전한 형태라고 생각한다.

그림자나 여백작업에서도 완벽을 추구하는 인간의 그림자를 구체로 표현하곤 하였다.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지구에서부터 광활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거시적 시각으로 세계를 바라보면 공간을 구성하는 본질적 형상은 대부분 구(球)로 이루어져 있다. 행성, 항성, 우주의 운동 궤도, 물방울조차 자연스럽게 구의 형상을 이룬다.

이러한 원리는 미시적 세계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어 단단해 보이는 물질도 전자현미경으로 확대하면, 실체라 믿었던 것들은 결국 텅 빈 공간 속에서 원자들이 배치되고, 그 사이를 전자가 끊임없이 운동하며 채우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즉, 우리가 감각하는 세계 너머의 실재는 다를 수 있으며, 시야를 확장하거나 축소할수록 궁극적으로 모든 것은 구의 형태로 수렴한다.

나의 작품에서 구체는 단순한 형상을 넘어, 미시적 입자로부터 거대한 우주에 이르기까지 세계의 본질을 상징한다. 구는 스스로를 감싸는 완전성을 지닌 동시에, 경계 없이 확장하는 무한성을 품고 있다. 나는 이러한 구의 속성을 인간의 형상과 결합하여, 우리가 지닌 내면의 우주와 존재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한다.

인간은 약 60조 개의 세포로 이루어져 있으며, 생명을 섭취하고 유지하다가 결국 소멸하여 지구의 일부로 흩어진다. 인간은 지구의 일부이고 하나의 우주이며, 그 안에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순환하며 또 다른 세계를 품는다. 그가 품는 세계는 그가 느끼고 생각하고 경험한 크기만큼이나 다양하다. 나는 구체 작업을 통해 우리가 개별적인 존재이면서도 동시에 하나의 거대한 흐름 속에 하나로 있음을 사유하고자 한다. 그렇게 나의 조각은, 우리 존재의 의미와 세계의 본질을 탐구하는 과정 그 자체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