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OTES / 2017

2017 전시서문 / 떠오르는 신성의 새벽 놀 - 백용성

July 31, 2018

 

떠오르는 신성의 새벽 놀

- 안경진, <신들의 춤> 전시에 부쳐

 

백용성(철학자, 미술평론가)

 

 

 

기이한 공간의 창발성

 

안경진 작가의 작품들과 그것들이 구현되는 전시공간은 어째보면 상당히 전통에 충실한 듯 보이지만, 전체적인 효과라는 면에서 본다면 단연코 전통적인 조형의 문법으로부터 벗어나 있다. 대게 조형은 그 어떤 무엇의 조형이기도 하거니와 조각된 그 무엇은 하나의 표현물로서 거기에 작품으로 홀로 있게 마련이다. 더구나 대부분의 조각 작품들은 몇몇 경우를 빼고는 그 특유의 물성과 촉각적 무게감으로 거기 있는 실존자로 다가온다. 하지만 기존 전시와 마찬가지로 이번 전시에서도 우리는 이러한 촉각적이고 단독자적인 조형성의 세계가 아닌 특이하고 기이한 어떤 조형의 세계를 마주하게 된다. 먼저 중력 벡터를 품은 촉각성의 장(場)이 물러나면서 빛과 그림자의 유희를 통한 새로운 광학적인 시각성의 장이 출현한다. 이 때 단독자로서의 작품은 주변 공간과의 전반적인 유희 관계로 들어서며, 빛-그림자 유희 혹은 형상과 ‘사이-공간’의 숨은 형상과의 유희가 우리의 시각을 이중으로 이끌며 새로운 세계로 안내한다.

 

대표적인 작품 <Awakening>이 보여주는 사이-공간은 ‘비어있음’을 포획해내 독특한 형상을 붙들어 맨다. 공간의 비어있음은 노자가 수레바퀴를 예를 들어 말하듯 수레바퀴를 돌아가게 하는 힘의 근원이기도 하다. 즉 “있음이 이로움을 만드는 것(有之以爲利:유지이위리)은 없음이 쓰임새를 만들기 때문이다(無之以爲用:무지이위용)” 그런데 안경진 작가는 이 ‘없음’, ‘비어있음’을 형상을 위한 여백이나 배경으로 방치하는 것이 아니라 지칠 줄 모르게 적극적으로 자신의 조형세계로 끌어들인다. 더군다나 그 비어있음에 턱 하고 자리를 잡은 것은 놀랍게도 붓다가 아닌가! 공즉시색, 색즉시공! 황홀경(enchantment)의 순간이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저쪽에 자리 잡은 <업보>로부터 촉발된 모험임을 알고 있다.)

 

그것은 무엇보다 정태적이고 촉각적인 감상의 공간을 변형하는 데서 성립되는 것으로 보인다. 물론 로잘린드 크라우스가 지적했듯이 현대 조각의 핵심 변수 중의 하나가 시간(감상자의 위치변경의 시간, 그 자체의 변조의 시간 등)임에는 틀림없지만, 안작가의 경우 그 시간성은 여러 얼굴들, 형상들로 표현될 뿐만 아니라(정면의 정상적 얼굴형상과 후면의 해골형상을 보라), 그 경험을 구부려 새로운 공간을 조형하는 데 이르고 있다(여러 사이-공간의 형상화작업들, 그림자존재들). 이렇게 형성된 ‘조형’ 공간은 작품의 둘레공간을 넘어서 전시 공간 자체의 새로운 조형성의 구축에 이르고 있다. 이는 결정적 순간이자 결정적 공간을 출현케 한다. 촉-시각적인 공간은 순수 시각적-광학적 공간으로 변조된다. 거기서 기존 경험 공간의 절개, 휘어짐, 되접어 펼치는 안무 비슷한 것이 일어난다. 무거움, 중력 벡터들이 증발하며 스스로 가벼워진다.

 

거인들의 게스투스(Gestus)

 

이번 전시에는 단연 눈에 띠는 것은 작품들의 포즈들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 크기이다. 보통사람의 크기를 넘어서는 거인들의 형상들, 그리하여 포즈 혹은 게스투스(Gestus)들은 시각-광학적 공간에 또 다른 비범한 느낌을 자아낸다. (<신을 만나는 순간>, <먼 곳을 보는 자>, <그림자와 춤을> 등) 브레이트가 고안해낸 서사극의 개념 중 하나인 ‘게스투스’는 개체들의 단순한 ‘제스처’가 아니라, 항과 항의 관계(특히 사회적 관계)들을 표현하는 연극적 장치이다. 안경진 작가는 이러한 게스투스를 밀어붙여 사회적 차원을 넘어, 초-사회적이면서 초-개인적인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간다.

 

그 영역은 무엇인가? <신을 만나는 순간>에서 ‘신’은 오늘날 무엇을 의미할 수 있는가? <먼 곳을 보는 자>가 보는 그 ‘먼 곳’은 어디이며 무엇일 수 있는가? 우리는 지금 새로운 신성의 영역을 직면하고 있다. 그것은 벤야민의 비판했던 숭배가치도 아니고, 저 고대적 마술로의 회귀도 아니다. 그러기 위해선 게스투스들이 신적 제스처로 바뀌어야만 한다. 오히려 그건 마치 카우프만이 역설하는 전통적인 신이 없는 “신성의 재발명”과 가깝다. 아직 우리는 그것을 무엇이라 칭할지 모르지만 겨우 ‘신성’의 영역이라 말할 수 있을 뿐이다.

 

하이게거는 “작품은 대지를 하나의 대지로서 존재하게 한다”고 한다. 하지만 전시 <신들의 춤>은 파울클레가 현대미술에 주문했던 것처럼, 아주 새로운 언어로 우리에게 속삭인다. “작품은 대지를 넘어 하늘로 나아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