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ugust 16, 2011
2011 전시서문 / 에로티즘의 모호한 섬광 - 백용성
에로티즘의 모호한 섬광
 
백용성 (철학, 미학박사)
 
1.
확실히 아우라의 시대는 저물었다. 그러니 이제 예술은 삶의 모든 두께를 스스로 감내해야한다. 그 빈자리는 그러나, 여전히 존재한다. 그것은 움푹 페인 구덩이처럼 혹은 펼쳐내어야 할 저 ‘유리’라는 절대 절명의 주권적이자 신학적인 실험 공간처럼 깊은 주름으로 함몰되어 있다. 하지만 비어있는 그 자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신의 이름, 율법의 이름, 아버지의 이름, 팔루스(Phallus)와 금기, 즉 신화적 폭력 자체를 문제시 하는 자리이다. 내면 깊숙이 그것은, 끊어지지 않는 욕망의 페르소나들로 극화된다. 평범하고 남루한 일상 아래에는 욕망의 둔탁한 흐름이 우리를 간간히 범람하고, 몽정이 우리를 할퀴고 지나간 자리마다 우울이 낮은 먹구름이 되어 지상을 휘덮는다. 우울한 자리는 이쪽과 저쪽의 어떤 거리, 간격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그것을 나르시시즘(거시기, 본능)과 승화(신, 초자아)와의 찢김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찢김의 자리는 동시에 그것의 탄생이자 탄생이 벌어지는 간격자체이다.
안경진 작가의 작품들은 이러한 간격을 살고 있는 셈이다. 이전의 작품들을 보라. 페르소나는 억눌리고, 욕망은 죄의 얼룩으로 승화된다. 초자아는 아직 당당하며, 종교적 상징의 변신들은 그 언저리를 맴돈다. 그러나 이번 작품들은 그 간격자체로 파고들어 그 간격자체를 만들고 생성시키는 간격이고자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리하여 이미지는 형상과 그림자라는 이중의 간격이 되고, 빛의 간격이 되며 마지막으로 그 둘의 묘한 간격을 증식시키기에 이른다. 따라서 작품들은 이러한 욕망의 할큄과 뜯김과 찢김의 느낌들을 극화하는 하나의 극장을 연출한다. 여기에 왜 잔혹성, 냉정성이 없겠는가? 왜 광기가 없겠는가? 외설적이고 도착적이고 변태적인 것이 당당히 자신의 틈을 열어 보인다. 바따이유가 말했듯 에로티즘이 이미 종교적 냄새를 띠고 있다면 이러한 장면들 속에서이다.
격투의 장면을 보고 싶은가? 익살스럽게 캐리커쳐화된 대머리 인물들이 난투극을 벌인다. 그러나 곧바로 그것은 야릇한 장면으로 바뀌고, 그다음 스크린을 통해 격정적 에로스로 변한다. 그림자에서 가격하려는 자는 여성으로 탈바꿈한다. 정확히 그의 머리는 절정에 달한 젖가슴으로 변하고 깔려서 당하는 자는 남자가 된다. 지나치게 비대한 그림자의 가슴은 부풀린 욕망을 과장하며 스스로를 희롱한다. 남자-능동-행위자-지배자, 여자-수동-수용자-희생자의 구도는 단순히 뒤집어지는 게 아니다. 즉 여자가 남자가 되고, 남자가 여자가 되는 식이 아니다. 그런 뒤집기는 단순한 위치 바꾸기에 불과할 것이고 여전히 위치는 위치들의 관계는 고정될 것이다. 그러므로 장면들의 변환에는 수렴점이 없다. 오히려 「에로스와 파토스」가 가격하는 지점은 정확히 이 위치의 고정성이다. 수렴을 모르는 무리수적 방황과 횡단. 이 위치관계를 끝없이 불안정하게 만드는 것. 그리고 변이를 발산케 하는 것. 이것이 묘한 웃음을 짓게 만드는 것이다. 너무나 가볍게도 우리는 고정화된 관계의 껍질들이 떨어져 나가는 것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은 폭력-지배-희생에 기반한 에로스의 계보를 뒤흔드는 것이다. 이것이 잔혹성 다음에 오는 효과들이다. 외설과 도착이 만들어 내는 변태는 이러한 고정되지 않는 변이들의 생성이다.
유혹하는 뱀을 보고 싶은가? 대가리를 물고 스스로 꼬인 두 뱀의 꿈틀거리는 입체감은 이중의 발기된 남성 성기처럼 근육질이고 동시에 그것은 절정에 오른 암수의 결합을 외설스럽게 안으로 말아 넣는다. 나아가 그 「이브」는 여전히 유혹의 그림자를 비춘다. 무엇이 원본이고 무엇이 원본의 복제, 그림자인가? 여기선 오직 복제의 복제라 불리는 시뮬라크르와 환상의 유희들만이 난무한다. 형상과 그림자 사이의 뒤집기, 부분으로 역전시키기, 투사하기는 근본적인 에로티즘 예술의 구문을 형성한다. 그리고 고귀함, 신실함과 순수함의 계열과 외설과 변태, 잔혹함의 계열 사이의 게슈탈트적(Gestalt, 혹은 형태심리학적) 교차가 있다. 이러한 교차는 「Pray」,「Original Sin」,「Tree of Buddha」에서 두드러진다. 사과는 위에서 봤을 때 우리에게 하트모양의 진부할 수도 있는 사랑을 표현하지만 옆에서 보면 그것은 누군가 베어 물었던 사과 즉 이브의 유혹과 아담의 위반을 상징한다. 그러나 거기엔 게슈탈트적 형상이 개입한다. 베어 물린 형상을 배경으로 전치시키면 모호한 두 인물(두 남자 혹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형상이 게슈탈트로 나타난다. 「Pray」는 어떠한가? 얼핏 보면 두 남녀의 다정한 키스가 있고, 그 둘 사이에 기도의 형태-게슈탈트가 드러난다. 그러나 여인으로 보였던 자의 목젖은 무엇을 말하는 것이고, 임신한 듯한 배는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기도의 성스러움은 외설적 형상물에 조롱당하는 듯이 거기 교차되고 있다. 나무-붓다는 순수와 외설의 계열에서 벗어나 자연과 신의 게슈탈트 관계를 엮어낸다. 나목은 잔챙이 나무로서 거울 속에 자신의 모습만을 비출 뿐인데, 그 사이 어느 샌가 붓다를 품고 있다. 그것은 겨우 빈 공간만을 품었을 뿐인데, 거기엔 이미 붓다의 게슈탈트가 배어든다.
 
2.
곳곳에서 관객은 작품의 의미추구에 좌절한다. “이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혹은 무엇을 표현하고 있는가?” - 이런 질문들을 말하는 자는 누구인가? 누가 이 작품은 어떻고 저 작품은 어떠하며 어떠해야하는지를 말하는가? 아마도 이러한 예술적 담론들과 비평들은 늘 빅 브라더 같은 ‘아버지’의 형상을 떠받치고 있거나 완화된 형태라면 기껏 주석적 자리만을 차지하거나이다.
그러나 안경진 작가의 작품에 나타난 형상 자체에서, 투사된 그림자에서, 그 둘의 관계에서, 의미는 부조리한 어떤 것의 회로 속으로 빠져드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현대 예술의 운명은 이러한 것이 아닐까? 의미가 탄생하는 지점까지 그 극단을 밀고 나가는 것, 그 다음 그 의미가 무의미해질 때까지 표현운동을 가속화 하는 것. 그리하여 무엇이 의미이고 무의미인지를 묻는 고답적 질문을 단숨에 제거해버리고 오히려 무의미의 운동 속에서 어떤 무엇이 솟아나게 하는 것. 들뢰즈가 말했듯 예술이 감각적이고 정서적인 블록들의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사유 양태라 한다면, 그것이 철학적 사유와 만날 수 있는 장은 바로 이러한 무의미의 장(場)에서이다. 무의미의 장이란 존재하는 모든 것의 부정이거나, 완고한 부인이자 정지를 의미한다. ‘아버지’, God Father로의 회귀와 내면적 투사를 통한 복종이 아니라, 새로운 강제적 운동의 생성과 그에 대한 즐거운 순종이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저 괴기하고 악마 같은 해저의 원초적 자연에서부터 인간의 승화된 모습까지의 지속 모두를 단번에 포착해야한다. 스크린에 투사된 사람의 형상은 초인의 형상이 된다. 해저 물고기들의 간격은 초인을 예비하고, 그 아가리들은 초인의 두 손을 욕망하며, 급기야 그 몸뚱이들은 초인의 날개를 꿈꾸지 않는가? 약동의 현기증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불가피하다. 물고기와 초인 사이에 진화적 간격은 아찔하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경험적인 진화론의 진부한 이야기가 아니다. 경험 세계에는 이러한 해저 물고기도 이러한 초인도 없다. 이것은 진화론을 가능케 하는 자연의 욕망과 꿈의 문제이다. 모든 존재하는 이차적인 자연이 역겨워질 때 우리는 존재의 가려움에 떠는 것이다. 2차적인 자연이 품고 있는 법과 금기와 정해진 조화와 아름다움이 우리에게 아무것도 말해주지 않은 때 의미는 무의미를 꿈꾸는 것이다.
따라서 원초적 자연과 힘을 정지된 하나의 이미지에 결정화시키는 게 문제다. 예술이 현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하나의 거부의 몸짓이 되고자 한다면 그것은 현존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단번의 정지, 얼어붙음, 서스펜스의 명령을 내리고 수행할 줄 알아야 한다. 잔혹과 광기가 있다면 이러한 행위 이외에 어디에 있단 말인가? 신의 폭력이라 할 그것, 진정한 사유의 탄생이라 할 그것, 혹은 원한다면 진정한 죽음이어야 할 그것이 아니라면.
* * *
 
이제 예술작업(poiesis)은 독립적 작품(ergon)을 내놓는 것만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프락시스(praxis)로 회귀하고 있는 예감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작품-생산물을 산출하고 그것이 작품-수용의 장에 들어가 이러저러한 판단과 평가를 받는 식의 방식만이 아니라(때로 그것은 얼마나 지겹게도 닫힌 회로인가?) 그보다 더 한 것, 그러니까 예술 이전의 장 자체를 열어 놓는 행위, 원초적 자연의 힘으로의 회귀 행위, 우리 안에 희미하게 존재하는 욕망과 꿈의 언저리에 섬광을 폭발케 하는 행위이며 그것의 징후-되기일 것이다.
 
 
 
A blurry flash of Eroticism
백용성 (철학, 미학박사)
Critic by BAIK, Yong Sung (Philosophy, Aesthetics)
1.
The era of Aura definitely has come to a close. Therefore, art ought to endure all thickness of life now. However, emptiness is still exists. It caved in as a furrow likes a heavily dented crater or absolute subjective and mythic laboratory called ‘Yuri’[1]. However, what is this emptiness? It is the name of god, the name of commandments, the name of father and Phallus and taboo, so to speak it is a spot where bring mythic violence into question. It dramatized as personas of endless desire in deep inner world. Under ordinary and ragged life, blunt flow of desire flood us intermittently, depression become lower dark cloud on every scratched traces of wet dream and they cover the ground. The spot of depression is initiated from a distance, interval between here and there. We can consider it as separation between narcissism(Id, instinct) and sublime(God, superego). However the spot of separation is birth of it and a gap itself which is the birth take place.
The works of AHN Kyungjin are living in this gap. Review her previous works. Persona was suppressed, desire sublimates into a stain of sin. Superego is still dignified and changes of religious symbols are circling around rim. However, these work burrows into the gap and it seems to be a gap again which produces a gap in itself. Therefore, the image become a dual gap of form and shadow, creates a gap of light and eventually it reached to proliferate the subtle gap between both parties. Accordingly, these works establish a theater which dramatizes the feelings of scratching, tearing and removing of desires. Of course, brutality and imperturbability definitely exist here. And madness also. Something obscene, perverse and abnormal opens up its gap grandly. As Bataille stated, if eroticism taking religious smell on, it is in the very scene of it.    
 
Have you ever wanted to see the scenery of fight? The bald characters which were caricatured humorously are tussling with each other. However it suddenly changes into a subtle scene and it change again into a passionate eros. Somebody who is trying to strike is metamorphosed into a woman. His head transformed into the breast reached to the climax and somebody being buried and attacked become a man. The excessive bulky breast is exaggerating and playing herself. The overthrow of the structure of men-activeness-actant-ruler, women-passiveness-accepter-victim is not simple. So to speak, man changes to woman, woman change to man, that is not the way of it. Such a simple overthrow means the only change of place, and its position, and the relation of position would be ever fixed. Therefore, there is no gathering point of the transformation of the sceneries. All the more, the point of striking of <Eros and Pathos> is definitely the fixity of this position. Irrational wandering and crossing without knowing gathering. Something makes this relationship unstable continuously. And something creates diffusion of modification. It evokes subtle smile. We simply face that bark of fixed relation is peeling off. It shakes the genealogy of eros based on violence-domination-sacrifice. This is the sequent effect of brutality. The metamorphosis which was created by obscene and perversion is the creation of this unfixable modification.
 
Have you ever wanted to see an ensnaring snake? The cubic effect of two wiggling snakes which are biting their heads mutually is muscular as an erect penis and it tucks lubriciously the union between male and female that reached the climax in. Furthermore, <Eve> still reflect the shadow of seduce. What is original, simulacre of original and shadow? Only simulacre and play of illusion are rampant. Overthrowing of form and shadow, reversing into a part, and projecting is forming a phrase of essential erotic art. And there is Gestalt crossing between the nature of nobility, sincerity and pureness and the nature of obscene, perversion and brutality. Such crossing usually stand out remarkably through Pray, and Original Sin, Tree of Buddha. The shape of apple is heart from above as a banal symbol of love, on the other hand, it symbols also apple bitten off by someone, that is, seduce of Eve and violation of Adam in profile. However Gestalt shape intervenes in there. Displacing the shape of bitten off into background, the shapes of two obscure characters (two men, or a man and a woman) are exposed by Gestalt. How about Pray? On the surface, there are hearty kiss of sweethearts and the shape of pray-Gestalt is exposed. However, what is the uvula (Adam’s apple) and belly that seem pregnant talking about? The sanctity of pray is crossing as if being ridiculed by obscene figuration there. Tree-Buddha weaves the Gestalt relationship between nature and God escaping from innocence and obscene. A leafless tree reflects only itself however it already embraces Buddha. So to speak, it embraces only emptiness however Gestalt of Buddha already permeates into there.      
 
2.
Audiences frustrated by seeking of meaning of artworks everywhere. “What is the symbol for? What is the meaning for? or what is expressing for?” – Who speak these questions? Who tell that what art work would be like? Perhaps, these discourses and critics on art always supports the shape of ‘Father’ likes Big Brother or only take up the part of footnotes.  However, from the shape itself, reflected shadow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both parties in the works of Ahn Kyungjin, the meaning seems sinks into an unreasonable circuit. Perhaps, this is the fate of art to be. So to speak, it is pursuing to the extreme point of dehiscence of meaning and accelerating workout of __EXPRESSION__ until the following meaning become meaningless. Accordingly, it is removing immediately the highbrow question that what is the meaning or meaningless and dragging something out from workout of meaningless. As Deleuze stated, although the workout of sensible and affective blocks, if art is a mode of thought, the field which is able to meet philosophical thought is that of non-sense. The field of non-sense means denying every existences or obstinate disapprove or suspense. Not by return to ‘Father’ or God Father and obligation through inner projection, creation of new enforced workout and delightful obey are important.
 
Therefore, we ought to capture the whole durability from basic nature of the outrageous and devilish ocean floor even to sublimated human. The shape which was projected on the screen becomes the shape of superman. Does the distances between fishes are foreseeing superman and that mouths desire two hands of superman, after all, the bodies dream the wing of superman? Although having dancing vertigo, it is unavoidable. The evolutive distance between the fish and superman is dizzy. However, it is not an old-fashioned story of empirical evolution theory. There’s no such epibenthos or superman in the world of experience. This is the matter of desire and dream of nature which make evolution theory available. When we feel that all the two dimensional nature is disgusting, we tremble with itching of existence. When the law, taboo, given harmony and beauty which being embraced by the two dimensional nature don’t say a word, meaning dream meaningless then.    
Therefore, the problem is to crystallize the basic nature and power into an image. If art tries to be a gesture of denying against everything, it ought to know how to give orders of sudden stop, frozenness and suspense. If brutality and madness are really existing, they are nowhere but these actions. A thing that is able to be called violence of God, or a thing that is able to be called birth of authentic thoughts or to be a true death if it is wanted.  
 
* * *
Now, artwork (poiesis) is not defined as just only produce individual work (ergon), but it shows the foreboding of return to praxis. This means it is not only by the method of generates work-product but also enters into the field of work-accept in order to be judged and evaluated (how much boring closed circuit it is!), but also it is something more, so to speak, the action that open the forum in itself taking precedence over art, the action of return to the power of basis nature, and the action that flashes around desire and dream which are existing dimmly in our inner side and is becoming a symptom of them.  


[1] The name of the village which is the main background of PARK, Sang-ryung’s novel <A study of Dea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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